폴란드 인민 공화국

 

[image] '''폴란드 인민 공화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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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공화국'''
'''Rzeczpospolita Polska'''[1]

'''폴란드 인민 공화국'''
'''Polska Rzeczpospolita Ludow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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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국기'''
'''국장'''[3]
[image]
'''1944년 ~ 1989년'''[4]
'''역사'''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폴란드 총독부'''
'''폴란드 제3공화국'''
'''1944년 12월 31일 폴란드 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1952년 7월 22일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89년 12월 29일 붕괴'''
'''지리'''
'''위치'''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인문환경'''
'''언어'''
폴란드어
'''민족'''
폴란드인
'''종교'''
가톨릭[5], 개신교, 정교회[6]
'''정치'''
'''정치체제'''
일당제, 공산주의, 군정(1981~1983)
'''국가원수'''
대통령 → 국가평의회 의장
'''정부수반'''
총리
'''주요 지도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경제'''
'''통화'''
즈워티
1. 개요
2. 형성
3. 영토
4. 역사
5. 사회
5.1. 경제
5.2. 교육
5.3. 여권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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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에 수립된 공산주의 국가. 소련위성국이였다.

2. 형성


● 친소파 폴란드(폴란드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될 무렵 얄타 회담에서의 합의를 통해 연합군은 폴란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자유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렇게 폴란드를 서방의 품에 안기게 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고, 폴란드는 중세 이후로 늘 러시아와 적대적인 관계였다는 민족감정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흘린 소련군의 피만 생각하더라도... 해서 스탈린은 폴란드를 공산주의자와 소련의 통제 하에 움직이는 위성국으로 만드는 사업에 주력했다. 그리고 1947년에 총선이 치러졌지만 폴란드의 통일노동당은 민심을 별로 얻지 못한지라 공정하게 총선을 치를 경우에 폴란드 인민당과 농민당의 압승이 확실시된다는 사실 자체를 스탈린 스스로가 잘 알고있었고 각종 공작끝에 통일노동당이 '''80%'''라는 조작한 득표율을 바탕으로 노동자당을 이끈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지지율은 당연히 공권력을 동원한 반대 정당 탄압[7] 및 부정선거를 통해서 이룩한 투표율이었고 일설에 의하면 스탈린 본인이 고른 숫자였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냉전 후 발표된 NKVD의 당시 비밀 보고에 따르면 실제로 노동자당이 얻은 득표율은 대략 10%대 정도로[8]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에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합당하면서 폴란드 본토의 정계가 일당 우위 정당제로 바뀌었으며, 1952년에는 주권 찬탈의 완료와 함께 신헌법을 채택하면서 아주 확실하게 공산주의 국가(폴란드 공화국→폴란드 인민 공화국)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의 망명 정부는 1947년의 선거를 부정선거로 선언하고 친소파 폴란드의 승인을 거부한 채로 1990년 폴란드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런던에 머무르면서 공산주의 폴란드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펼쳤다.
● 공산주의 폴란드(폴란드 인민 공화국)
흥미롭게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에 특이한 점은 있는데 냉전 시기에 동유럽의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시위로 정권이 변화하는 일이 없었던데 반해[9] 폴란드는 두 차례에 걸쳐서 시위로 정권을 변화시킨 적이 있었고, 그래서 공산권에서는 '''인민의 힘이 강한 나라로 손꼽혔다.''' 또한 연대노조가 10년에 걸쳐서 투쟁을 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또한 타 공산국가였으면 진압되고도 남았다는 점에서 당대 폴란드 정치의 유연성은 공산권에서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도부 두명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았는데 고무우카는 집권 중반기 이후로 지식인층의 실망을 얻었고, 1960년대 중후반의 경제위기와 1970년의 생필품 가격인상으로 노동자층의 지지마저 상실하여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실각했고, 그 뒤를 이은 기에레크도 초반에 잘 나가는 듯하다가 결국에 외채문제로 인해 경제난에 빠졌고, 연대노조가 결성되는 일까지 벌어지며 쓸쓸히 퇴진했다. 물론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겸 민주화 운동가였던 레흐 바웬사도 결과적으로 고무우카나 기에레크와 크게 상황이 다른 건 아니기는 했지만.

3. 영토


새로운 폴란드를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바로 영토 문제였다. 원래 전쟁 당시 폴란드 망명 정부는 전후 동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 그리고 포메른 지방의 일부 국경 지대를 할양받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후 소련이 폴란드 침공 당시 점령했던 영토를 전후 폴란드에게 돌려준다는 가정 하의 얘기였고 스탈린은 당연히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차지한 영토들을 다시 내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10] 대신에 독일의 슐레지엔동프로이센, 포메른 지역을 뺏은 땅에 대한 보상으로 폴란드에게 주려고 했다.
전후 폴란드의 영토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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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이전 나치 독일의 영토.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
연두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오데르-나이세 선.
파란색으로 변경된 국경선커즌 선.
이 결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중 빌노(Wilno, 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11] 르부프(Lwów, 현 우크라이나 리비우), 브제시치(Brześć, 현 벨라루스 브레스트) 등 약 17만 8천 ㎢를 소련에게 잃었으나 독일로부터 동프로이센 절반, 포메른과 슐레지엔 등 약 10만 1천 km2를 할양받아 영토적 손실을 벌충했다. 하지만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가 너무 컸으므로 전후 폴란드의 면적은 전쟁 전에 비해 오히려 7만 7천 ㎢가 줄었다. 잃은 지역에 비해 얻은 지역의 산업기반 등의 가치가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땅 크기만으로 손실이라고 볼 순 없긴 하나, 이로 인해 생긴 외교적 갈등과 더불어 2차대전 당시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해 놓고는 그 때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 싫어서 새로운 땅을 생색내면서 던져줘 국경을 바꿔버린 스탈린의 행각에 폴란드인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또 강제로 동부 폴란드의 고향에서 밀려나 낯선 땅에 정착하게 된 폴란드 사람들은 조만간 공산권과 서방 간에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폴란드 영역이 원래대로 회복될 거라고 생각해 1970년대까지 새로 얻게 된 땅을 개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동부를 잃고 서부를 얻어 전체적으로 서쪽으로 이동한 국경선 덕분에 민족과 국가의 영역은 예전보다 잘 일치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란드는 역사상 최초로 단일 민족 국가가 된다. 다만 원래 그 민족이 거기 살아서 그랬던 게 아니라 나치의 대규모 학살과 전후 독일인 추방, 우크라이나인들의 재정착 등 강제적인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게 됐다. 이렇게 새로 바뀐 영토로 인해 추후에 불거진 논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를 참고.

4. 역사



5. 사회



5.1. 경제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국가 중 하나로 전쟁 이전 폴란드의 인구는 3500만 명 정도였으나 종전 후에는 인구가 2400만까지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으며 산업기반도 38% 가량이 파괴되어 버렸다. 이후 소련의 지원 아래 경제를 복구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집단농업화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빠르게 경제가 성장하는 듯 싶었으나 결국 경제성장이 둔화되었고 잦은 반소 시위 아래 경제가 침체되었다. 또 1960년대 후반의 경기침체는 재정적자가 가중화시켰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는 서방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리고 경제개방 정책을 시행했고 처음엔 상당한 효과를 내서 경제가 다시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서 1970년대 중반기에 오일 쇼크가 닥쳐오면서 수출이 급속히 악화되는 바람에 경제는 다시 악화되었으며 이 여파는 1990년대까지도 폴란드 경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1988년 기준으로 폴란드의 국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0$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당시의 한국과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오나 실제 이 수치는 뻥튀기 된 것에 가깝다. 실질적으로 폴란드는 198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잡혔던 상태였고 서유럽에 비하면 매우 가난한 국가였다.
그래도 19세기부터 꾸준히 산업화에 성공했던 역량을 가진 나라라서 공산권 국가들 사이에선 소련, 동독, 체코와 함께 상위권에 랭크되는 나라중 하나였으며, 폴란드 산 공산품은 사치품으로 인기 있었다.

5.2. 교육


2차 대전 동안 절대다수의 폴란드의 아동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교육을 책임질 만한 지식인들은 나치와 소련에게 살해당하거나 정치적으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을 떠나 살아남은 사람들도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 공산주의 이념을 아동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종전 후 폴란드 공산정권은 적극적으로 교육제도 개혁에 나섰다. 그 결과 7년 과정의 초등학교 과정과 4년 과정의 중고등학교 과정이 도입됐으며,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직업 학교도 폴란드 곳곳에 설립된다. 1970년대의 통계에 따르면 이러한 공교육 제도 도입의 효과로 폴란드 전역에서 문맹률이 대폭 개선됐으며[12] 노동자 사이에서 의무교육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의 비율도 4~5%대로 크게 떨어졌다. 또한 나치에 의해 대부분 파괴당한 대학교도 재건되어 1950년대 말에 이르면 인구 당 대학생의 비율이 전쟁 전보다 3~4배 가량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5.3. 여권신장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문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기존의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여권이 낮은 국가 중 하나였다.[13] 하지만 공산정권 수립 이후 폴란드에서는 여성들의 권리 신장 및 사회 진출이 급속도로 빨리 이루어지면서 냉전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유럽보다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실례로 1980년대 통계에서 의학, 건설, 공학[14] 등의 분야에서 직업을 갖고 있던 여성들의 비율이 서유럽보다도 높았던 것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의학의 경우 여성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 1944~1952[2] 1952~1989[3]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는 달리 낫과 망치나 별 등 공산주의를 나타내는 상징이 없는 것이 특징. 물론 국기와 국가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의 폴란드 제3공화국 국장과의 차이는 왕관이 없다는 것.[4] 영문위키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연도 기준이다.[5] 물론 정권에서는 탄압했지만, 요한 바오로 2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다수 폴란드인들의 신앙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가톨릭국교는 아니며, 폴란드가 민주화된 후에도 끝내 가톨릭이 폴란드의 국교 지위를 공식적으로 되찾지는 못했다.[6] 개신교와 정교회는 가톨릭보다도 더욱 강한 탄압을 받았으며,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가톨릭 탄압이 완화되는 와중에도 개신교와 정교회에 대한 탄압은 그다지 완화되지 않았다.[7] 1946년에 모든 우익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노동자당과 그 자매 정당만을 합법 정당으로 규정했다.[8] 50%라는 자료도 있는데 50%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 헌법 제정 시 득표율이다. 그나마 이것도 스탈린 동무께서 친절히 주작질 하신 결과물.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레흐 바웬사 정부에서 당시 폴란드 선거를 재조사한 결과 통일노동당의 지지율은 10%대 남짓이었던 것으로 발표됐다.[9] 1953년 동독 시위나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이 결국 체제 자체를 변모시키지 못하고 강제진압되었다.[10] 예외적으로 원래 커즌 선 서쪽에 있던 비아위스토크 지역만은 폴란드에 돌려주었지만 커즌 선 서부에 위치한 르부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던 도시였음에도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다만 리비우는 폴란드계 주민 못지않게 우크라이나계 주민도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만약 르부프가 폴란드의 영토로 남았다면 현실의 리비우와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 쪽에서 르부프를 자신들이 수복해야 할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11] 폴란드가 전간기인 1920년 빌뉴스 위기를 통해 합병했다. 폴란드 침공이 완료된 직후 리투아니아로 반환되었다가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하면서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12] 폴란드 제2공화국이 1919년 수립될 당시 농촌 지역으로만 따지면 70% 가까운 인구가 문맹이었다. 물론 이건 러시아 제국이 의도적으로 폴란드를 우민화시키려고 했던 정책에 따른 결과지만.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1937년에는 문맹률이 18%까지 낮아졌다.[13] 물론 폴란드 여성의 대학교 진학을 막았던 것은 폴란드인들의 남성우월적인 태도보다는 당시 폴란드를 통치하던 러시아 제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하겠지만.[14] 느낌이 오겠지만 이 분야는 보통 남초현상이 두드러지는 분야이다.